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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로마 4일째, 까따꼼베와 쿼바디스 성당

낯선 곳에서 놀기/2008 이루어진 유럽여행

by sundayeunah 2009. 1. 23.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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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은 스페인광장이나, 진실의 입에 있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없었다면 나는 로마에 대한 기억이 아무것도 없을 뻔 했다.(바티칸과 아말피는 로마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바티칸과 아말피에 대한 기억이므로...) 나에게는 이날 하루가 로마의 휴일이었다.

로마의 지하무덤 까따꼼베와 쿼바디스 성당에서의 단상, 그리고 저녁 무렵, 로마의 삼청동과도 같은 뜨라스떼베레에서 맛본 석양의 와인 두 잔. 휴일 같았던 로마에서의 하루. 로마에 대한 나의 유일한 기억.


오전 11시
까따콤베 산칼리스토 Catacombe San Callisto

혼자 까따꼼베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유스호스텔 리셉션에서 안되는 영어로 버스 번호와 버스를 타야 하는 곳의 정보를 겨우겨우 듣고, 한참을 헤매 겨우 버스를 탔다. - 정보를 자세히 적고 싶은데 불행히도 적어 놓질 못했다. 
그저... 나도 찾았는데, 그 누구나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긍정적인 생각 말고는....




버스는 로마의 외곽으로 한 20분을 달려 까따꼼베에 나를 내려놓았다.





 

 





까따꼼베 입구를 향해 걸으며, 나는 내가 왜 로마에서 그리 여유가 없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돌길로 된 로마에는 나무가 없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도 돌바닥에 쨍한 햇볕만이 강렬하게 내려쪼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물이 만들어내는 팍팍한 그늘에서 팍팍한 휴식을 취한다.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도, 바람도 없는 팍팍한 공기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로마에 분수가 많은 이유는 그만큼 로마가 건조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숨통이 트였다. 
나무가 있고 풀이 있어서 머리와 눈이 시원해졌다. 사람은 역시 흙과 풀이 있어야 한다. 우선, 정말, 살 것만 같았다.  













사진 촬영은 금지였다.
나는 어느 신부님의 가이드를 받으며 무덤 속을 돌아다녔다.

내가 여길 온 이유는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여긴 일종의 성지다.

나에게 이 지하무덤은 초기 그리스도인이 로마군의 박해를 피해 생활하던 삶의 터전이었다. 로마인들은 무덤을 아주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군대가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앙을 지키고 싶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 군대의 박해를 피했다. 신앙을 위해서라지만 햇살이 들지 않는 지하 무덤에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로마의 까따꼼베는 바울 시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적인 순결한 신앙에 대한 간증이다. 


그러나 신부님의 설명은 자꾸 다른 곳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그게 그때 당시의 현실이었으리라.  
 







신부님의 설명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한 신앙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매장당한 후 짜잔 부활하려는 로마 후기 그리스도인들의 샤머니즘적인 매장 관습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는 이 무덤은 일종의 명당 자리였던 거다.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무덤을 써서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는 거다. 이 무덤 자리는 비싼 값에 팔렸고, 그럼에도 수요가 공급에 따르지 못해 오래되어 부패한 관에 새로운 시체를 계속 쌓아 올렸다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한 신앙에 감동을 얻고 싶었던 나는, 로마 후기 그리스도인들의 말도 안되는 명당 다툼과 그들의 샤머니즘적인 믿음이 불러일으킨 신앙의 왜곡에 약간은 실망한 마음이 되어 무덤을 떠났다.





여행책자는 까따꼼베 근처에 쿼바디스 성당이 있다고 씌여 있었지만, 이 외곽에서 괜히 버스를 놓치면 어떨지 몰라 그냥 로마로 가기로 했다. 로마로 가는 버스는 1시간에 2대다. 버스가 왔길래 아무 생각 없이 서둘러 탔다.  


여행 책자에 쿼바디스 성당은 "appia antica 정류소 하차" 라고만 간단히 씌여 있었다. 그게 어딘지 몰랐다. 그런데 까따꼼베에서 로마를 향하는 버스를 타고 한 5분을 가다 우연히 선 어느 정류소 이름이 appia antica였다. 

 





오, 마이, 갓,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인 양,

웨 웨 웨 웨 웨잇... 플리즈...


를 외치며 겨우 겨우 내렸다. 성당 표지판도 없는 한적한 그 도로에서,
나는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잡고 쿼바디스, 쿼바디스 했다. 







쿼바디스...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가 내린 정류장의 바로 옆 건물을 가리켰다. 이런, 정류장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건물.












이 성당은...
내가 유럽여행, 아니 그 어떤 모든 여행을 통털어서 본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다. 아니, 성당다운 성당이다. 나는 바티칸에서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 성당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은 베드로를 기린 성당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성당이야말로 가장 베드로다운 성당이며, 베드로가 자기 이름을 붙이고 싶은 유일한 성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성당이야말로 베드로 성당이다.


한 30명이 앉으면 꽉 찰 것 같은 이 성당. 베드로가 생각하는 베드로 성당...

성당 위에 벽화에는 베드로와 예수님이 있다. 선생인 예수님은 33살에 부활했으니 여전히 젊고, 살아 남아 선생의 뜻을 펼치는 것을 사명으로 살았을 그 제자 베드로는 초로의 늙은 노인이 되었다. 게다가 그때 베드로는 박해를 겨우 피해 로마를 허둥지둥 피하던 때였다. 허둥지둥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안도했을 초로의 늙은 베드로에게 33살의 젊은 예수가 나타났다. 베드로는 물었다. 주님, 어디 가세요. 어딜 가세요. 예수가 답했다. 네가 버리고 떠나는 로마로 간다. 베드로는 먹먹했겠다, 싶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며 닭이 울기 전 스승을 3번이나 배반했던 젊은 날의 혈기왕성했던 베드로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늙은 베드로는 그 때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는 다시 조용히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로 돌아가며 자신이 예상했던 것처럼 그는 죽음을 당했다. 혈기왕성하고 성정이 욱하고 눈빛이 사나웠을 베드로는 이렇게 조용히 죽음을 당했다. 쿼바디스 성당은 이렇게 베드로가 죽기 직전 예수님을 다시 만난 그 장소에 세워졌고 그 때를 기리고 있다. 솔직한 만큼 욱해서 예수님이 특히나 걱정하고 더욱 사랑했던 베드로의 최후. 그 둘의 만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베드로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 같아서, 그게 그저 내 이야기인 것 같아서 그저 눈물이 났다. 나에게는 로마로 가라는 무서운 명령이 아니라, 큰 위로같이 느껴져 부럽고 감사했다. 









성당에는 예수님의 발자국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진짜 발자국이면 어떨고, 가짜면 어떨 것인가. 진짜여서 누군가는 왕창 감동을 받을 것인가?(어, 그런 사람이 있나?) 그 발자국 때문에 안 믿던 사람이 믿을 것인가, 그게 정말 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인가?    






나는 그건 회의적이다. 나에게는, 이 실제라는 예수님의 발자국보다는, 유명하지 않은 어떤 화가가 그린 젊은 33세의 부활한 스승과 스승이 남기고 간 현실을 살아낸 초로의 늙은 제자의 갑작스런 만남이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22일] 로마 4일째, 로마의 삼청동 뜨라스떼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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