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스페인을 로망하며 이 책을 사서,
2017년, 스페인을 다녀온 후 이 책을 읽었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90년대는 대학생들의 유럽배낭여행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때다. 런던 인-파리 아웃으로 대표되는, 런던, 암스테르담, 프라하, 빈, 프랑크푸르트, 혹은 뮌헨, 인터라켄, 밀라노, 베니스, 피렌체, 로마, 바르셀로나, 파리 등등의 도시를 점핑 점핑하며 기차를 타고 다니는 30일 여정의 그런 여행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런 여행을 가지 못했던 나에게 스페인 전역을 여행한 후 쓰여진 여행기, 그것도 작가가 쓴 여행기는 꽤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1달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도 경험하지 못하는 스페인. 어차피 너나 나나 가지 못한 곳에 대한 여행기. 스페인은 여행 로망자인 나에게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김혜순 시인이 쓴 스페인 여행기, 들끓는 사랑은 1997년 출간되었다(학고재 출판사의 세계문화예술기행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스페인 전역이라고는 하지만 지금보니 아마도 1달 미만의 여정으로 여행한 후 남긴 기록일 것 같다. 1달 여행 후 1권의 책을 쓰다니... 스페인 정착기도 아니고 여행생활자란 직업이 있는 요즘에는 사실 상상이 안되긴 하지만, 그때는 그 만큼 여행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얄팍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앞부분만 넘기작 넘기작 하다 책장에 넣어두었다. 글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장님이 더듬더듬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 같은 답답한 느낌? 가 보지 않은 내가 따라가기엔 영 재미가 없었다.
20년이 지나, 오래된 책을 정리하면서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 나는 배낭여행도 다녀왔고, 스페인이 좋아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만 따로 여행을 다녀온 터였다. 다녀온 후 읽으니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이 책의 한계가 이것일 것이다.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공감이 안 되고, 스페인 생활자들이 보기에는 얄팍한, 그러나 나처럼 딱 20일 남짓 다녀온 사람들은 '나도.. 나도 그때 그랬는데...'하면서 읽을 수 있는...
내가 스페인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플라멩고와 돈 끼호테와 가우디와 고야에게 들어 있는 웃음과 죽음이다. (p.14)
(플라멩고 춤을 보고) 우리는 이 동굴 안에서 몇 개의 인생을 살아낸 듯이 느껴진다. 플라멩고가 파하고 밖으로 나가던 늙은 일본 남자가 둥굴의 턱에 걸려 넘어졌다. 마치 길고 긴 인생의 박자를 다 헤아려 본 듯이.
그 춤이 어떤 춤이든 죽음을 알처럼 품지 않은 춤은 가짜다. 죽음이 깃들지 않은 춤은 생명의 환희도 드러낼 줄 모른다. 도약하는 동작 속에 잦아들고 폭발하는 죽음이 없다면 그 춤은 가짜다(p.163)
스페인을 떠나는 아침 비가 내렸다. 새벽 일찍 숙소를 나섰는데 여름 내내 한번도 내리지 않았던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열기와 함께 수분이 땅에서 가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온 하늘과 땅이 붉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가 탄 차가 붉은 대기 중으로 붕 떠올랐다.
죽음과 고통을 끓여 웃음을 만들었던 그 나라가 우리를 잠시 붉은 대기 중에 가두어다 놓아주었다. (p.323)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한다는 차원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은 아니다. 그러나 경험한 자의 마음 속 절실했던 한 마디를 끄집어낸 후기로서 이 책은 나에게는 좋은 책이었다. 요즘 의미 없는 책은 죄다 알라딘 중고매장에 팔아버리는 나에게, 이 책은 20년 전 스페인을 로망했던 20대의 나와 스페인을 경험했던 30대의 나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기꺼이 간직할 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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