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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강진] 다산 정약용의 18년 - 다산초당과 다산기념관

낯선 곳에서 놀기/우리나라 좋은나라

by sundayeunah 2013. 10. 3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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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강진, 보길도, 진도를 돌아 본 3박 4일 이번 여행, 첫날의 여정

서울 --> 강진 무위사 (관련 글은 여길 클릭) --> 영랑생가 (관련 글은 여길 클릭) --> 다산초당과 다산문화관 --> (백련사) --> (녹우당) --> 대둔사 --> (두륜산 케이블카) --> 송지 해수욕장 --> 땅끝마을 숙소

 

 

 

내가 과거의 역사 속으로 타임슬립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면 어느 시기를 갈까....라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생각할 때마다 결론은 정조의 시대다. 정조가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래서 정약용 같은 사람들이 조금 더 빛을 발했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에 나도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조선 정조의 시대로 가게 된다면, 정조의 건강 관리나 독살 저지(정조의 독살설도 미스테리 역사물의 주요 소재다) 힘을 보태고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정조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당대의 천재이나 그 천재성을 발휘하기에 너무 가팔랐던 시대를 살았던 정약용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38년) 나서, 젊은 시절 정조의 총애를 받고 관직 생활을 하다가, 정조가 죽자마자 그 이듬해인 1801년, 그의 나이 40살에 신유사옥에 연루돼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노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됐고, 그는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았다.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됐고, 셋째 형 정약종은 옥사했다. 다산의 삶 관련 링크 : 남양주에서 만든 다산 정약용 홈페이지 (남양주는 그의 고향이다)

 

 

강진은 그의 18년 유배지였다. 그 중에서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 불리는 이 작은 집에서 유배 생활 후반기의 약 10여 년을 머무르며 여기서만 500여 권의 책을 썼다.

정약용이 이 곳에 처음 방문했던 것은 유배 생활이 7년에 이르던 때였다. 이곳은 해남 윤씨 집안 - 다산의 어머니가 해남 윤씨이니 일종의 외가인 셈이다 - 의 산정(山停)이었다. 지난 7년 동안 주막과 제자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던 그는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하고 조용한 이 산정이 맘에 들었고 시를 지어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윤씨 집안의 흔쾌한 허락으로 이곳에서 지내게 된 다산은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고 이곳에서 머무른 10년 동안에만 18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530여 권의 책을 저술한다.

 

 

 

 

 

다산 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약간 가파르지만, 한 10-20분만 오르면 된다.

 

 

 

 

 

 

 

 

이 곳에서 그는 530여 권의 책을 썼다.

주역, 춘추, 논어 등 성리학 고전인 사서, 육경을 연구한 책들부터, 국가 개혁안을 담은 책(경세유표), 지방행정 쇄신을 제안한 책(목민심서), 유명한 판례를 모아 놓은 법률 관련 서적부터 지리서, 의학서, 언어학, 속담집 등 그 관심사는 실로 깊고도 다양했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 화성 준공 프로젝트를 이끈 과학자기도 했다. 성을 쌓는 경험이 없었던 다산은 정조가 "10년 안에 지으라"던 수원 화성을 34개월 만에 완공했다.암행어사로도 활동했던 현장 경험도 책을 쓰는데 좋은 밑천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유배지에서는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산과 관련한 박석무 다산연구소 소장의 인터뷰. 다산에 대한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다. 알았다면 행동하라 ... 기쁘지 아니한가, 중앙일보, 2013년 11월 19일 p.20

 

 

 

 

 

 

다산 초당에서 저 멀리 보이는 남도의 바다. 이곳에서 그는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형을 그리워했을 것, 이라고 안내판에 설명이 되어 있다. 형 정약전은 다산의 유배생활 16년째 되던 해에, 유배지에서 죽는다.

 

 

 

 

 

다산은 18년의 유배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간다.

그리고 5년 만에 초당의 제자들이 다산을 찾아왔다. 다산은 심어 놓은 꽃들은 무성한지, 그 곳의 잉어들이 잘 자랐는지, 다산초당은 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꼼꼼히도 묻는다. 다산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다산초당을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고 했다. 

 

 

 

다산제생문답증언문(茶山諸生問答證言文)

다산초당의 제자들이 한강 상류의 집까지 나를 찾아왔다. 다른 일을 마치고 물었다. 

-올해 동암(東菴)의 지붕은 이엇느냐?

-이었습니다.

-홍도(紅桃)는 시들지는 않았느냐? 

-싱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우물가에 쌓아놓은 돌들이 무너지지나 않았느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못 속의 잉어 두 마리 다 컸겠지?

-두 자 정도 자랐습니다.

-백련사로 가는 길가에 심은 선춘화(先春花)는 모두 무성하게 자라더냐?

-그렇습니다.

-너희가 올 때에 이른 차를 따서 말려 놓았느냐?

-미처 말리지 못했습니다.

-다신계의 전곡이 결손이나 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다시 다산에 갈 수 없음은 또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혹 다시 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옳을 것이다"

계미년 초하루, 열상 노인(다산 본인을 지칭)이 기숙과 금계에게 두 사람에게 써 주다

*1823년 초여름(음력 4월)에 옛날 초당의 제자이자 다산초당 원주인 윤단(1744-1821)의 손자들이 한강 상류에 있는 다산의 집까지 찾아왔을 때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하여 남김

 

나는 이 증언문을 다산초당을 보고 들렀던 다산기념관에서 봤다. 다산초당을 보고 내려오는 길이어서 그런지, 다산의 그리움이 더 와닿았다. 결국 훈계의 글인 것 같지만, 그 속에 있는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다산초당은 주차장이 열악하다고 했다. 없다고 보는 게 맞다. 나는 주차를 생각해 그 근처에 있는 백련사를 들를까, 아니면 다산기념관을 들를까 잠시 고민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도 참 좋다고들 했다.

나는 시간이 된다면 다 들를 생각으로 우선은 다산기념관으로 가서 차를 세웠다. 다산기념관에서 다산초당 초입까지 가는 길은 약 10분 정도였던 것 같다. 다산초당 초입에서 다산초당까지 다시 10분-15분의 산길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은 약 30-40분 거리다. 보아하니 본격적인 산길일 것 같아서 나는 이번에는 백련사는 포기.

 

 

 

 

 

다산초당에 다녀와서 다산기념관을 둘러봤다. 입장료는 없다. 가길 무척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또 새로웠다.

내가 갔던 10월 초, 마침 다산의 편지 기획전을 하고 있었다. 편지 쓰기를 즐겨했던 다산 -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의 편지 220통은 문집에 실려 있다. 이 기획전은 문집에 실려 있는 않은 다산의 편지를 소개해 주고 있다.

 

 

 

 

 

다산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올라온 지 10년. 유배지의 제자인 황상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과 이에 대한 해석이 자세히 설명돼 있었다.

 

 

 

다산여황상서간첩

헤어진 지 벌써 10년이 지났구나. 네 편지를 기다렸지만 편지가 이승에서는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침 연암을 만나고 보니 마음이 더욱 서글퍼져서 여기 몇 자 적는다. 몇 해 전부터 여전히 힘들여 농사짓고 여전히 고생하고 있단다.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이 그 안에 있다"고 하신 성인의 가르침을 몸소 경험하는 게 아니겠느냐? 너는 틀림없이 학래와 석종 등의 행동거지를 듣고 그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한평생 힘써 농사지으며 사슴이나 멧돼지와 기꺼이 노니면서도 세상을 경륜하려는 깊은 뜻을 품고 있지 않다면 어찌 자신이 대단하다고 자랑할 만하겠느냐? 내 근황은 연암이 자세히 알고 가니 자세히 물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자년 11월12일 열수 씀.

다산이 고향에 돌아온 지 10년 만에 황상의 소식을 전해 듣고 쓴 편지이다. 황상은 다산과 헤어진 지 10년 동안 한 번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게 퍽이나 서운했겠지만, 스승인 다산은 농사를 짓고 지내는 자신의 근황을 전하며 마찬가지로 농사를 지으며 지내고 있는 황상에게 세상을 경륜할 깊은 뜻을 품고 살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 아울러 같이 공부한 다른 제자들의 삶도 이해하라며 스승으로서의 다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열수는 정약욕의 또 다른 호다.

 

 

 

다산기념관에 있는 정약용 선생의 초상화. 다산의 후손 몇 백명의 모습을 토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기념관 뒷편에는 이렇게 다산의 동상과 함께 그의 어록들이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특이하게도 각각의 문구를 선정한 사람들은 일반 시민부터 유명 인사까지 다양하다. 다산의 말과 함께 그 말을 선정한 사람들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전 대통령, 추기경부터 시작해 농부, XXX 할아버지 등 직업도 다양하다.

 

 

 

 

다산기념관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도 참 예쁘고 호젓하다. 대나무길을 지나고 숲 고갯길을 하나 넘으면 된다. 백련사 가는 길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이 길이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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