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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와 서울의 대형교회

낯선 곳에서 놀기/우리나라 좋은나라

by sundayeunah 2014. 11. 2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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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3박 4일.

영주 부석사 -> 소수서원(선비촌) -> 영주 무섬마을 (숙박) -> 봉화 (닭실마을 옆 청암정) -> 봉화 청량산과 청량사 -> 안동 도산서원 -> 안동 금포고택 (숙박) -> 안동 시내 -> 병산서원 -> 하회마을 (숙박) -> 올라오는 길에 속리산 법주사

 

약간 돌아가는 길이긴 했지만 그래도 법주사를 가 보고 싶었다. 워낙 유명한 절이라니깐. 이름만 많이 들었지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어서 궁금했다. 사진으로 많이 보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금불상도 한번 보고 싶었다. 규모에서 압도되는 감동...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다녀온 후 느낀점은... 여기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매력적인 장소는 아니구나... 여기는 신앙이 있는 불자들에게나 매력적인 장소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숨결보다는 현재의 신앙이 더 압도적인 곳이다. 교회로 치면 여기는 근대 유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골 마을의 작은 교회가 아니라 서울의 대형교회다. 신자가 아닌 사람이라면, 단순한 여행자라면, 서울의 대형교회를 가지 않는다. 그런 느낌이랄까.

다녀오면 또 가고 싶고 그래서 여러 번 갔던 절들이 있다. 영주의 부석사, 강진의 무위사, 순천의 선암사 같은 곳이 그런 곳이다. 여기는 다시 오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법주사의 대표상품이 바로 이 금불상이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불상.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8m의 기단 위에 높이 약 25m의 불상이 세워졌다. 사용된 청동은 약 160톤, 도금된 황금은 80kg에 이른다. 

 

금동미륵불상도 아니고 어색하게 '통일호국'이라는 요즘스러운 단어가 들어간 데는 이유가 있다.

신라시대의 금동미륵대불, 대원군에 의해 몰수, 화폐로 주조

법주사의 시작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혜공왕 12년 (서기 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 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조선까지 건재했던 그 금동미륵대불은 조선 고종 9년(1873년) 대원군이 경복궁 축조에 소요되는 자금 마련을 구실로 몰수된다. 금동미륵대불은 당백전 화폐로 만들어졌다.

 

 

 

1963년 시멘트미륵부처님, 1990년 청동부처님, 2002년 통일호국 금동미륵불상

일제치하였던 1939년, 장석상 주지스님이 김복진 조각가에 의뢰, 시멘트 부처님으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문제는 6.25 전쟁으로 인해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20% 공정을 남겨둔 채 중단 된 것. 이를 마무리한 것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장군이다. 1963년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1964년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되었다.

붕괴 직전인 시멘트미륵부처님은 1990년 청동미륵상으로 재탄생한 후, 마지막으로 2002년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일월드컵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는 거창한 의미를 달고 금불상으로 탄생한 것이다.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이 900m2에 이르고 80kg의 황금이 소요되었다. 3만 여 불자가 시주를 했다.

이 불상의 어깨에 호국, 국난극복, 민족화합, 세계평화의 소망이 달려 있다.

 


 

 

 

 

참, 법주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도 있고 보물도 있고 지방유형 문화재까지 포함하면 40개가 넘는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불상은 그 어떤 문화재로도 지정되어 있지 않다. 시간의 힘이 약하기 때문일까.

 

 

 

 

 

 

법주사에서 좋았던 것은 따로 있다. 법주사까지 들어가는 이 숲길과 가는 길에 들러서 먹었던 한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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