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한다. 승자의 시각으로 기록된다. 패자의 과오(過誤)는 승자의 출현과 승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조되기 마련이고, 패자의 공적(功績)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
그러나 사마 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이러한 평가에서 약간은 자유로워도 될지 모른다. 그가 사기를 썼던 시기는 서기 약 100년 전. 중국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했던 진시황제의 통치를 거쳐, 진나라가 망한 이후 항우로 대표되는 초나라와의 다툼 가운데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쥔 한나라의 시대이다.
총 130권 중, 12권으로 구성된 사기 본기(本紀)는 중국 전설시대의 왕부터 당시 왕이었던 한나라 무제까지의 왕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승리자의 관점에서라면, 역사가는 진나라의 패악무도함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진시황제와 그 아들 이세황제의 폭정과 백성의 고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승리자의 관점에서라면, 승리자였던 한나라와 대적해 최후의 경쟁자로 싸웠던 초나라 항우는 어리석거나 잔인하게만 그려져야 한다. 게다가 왕도 아니었던 항우가, 실질적인 왕의 권한을 누렸다는 이유로 왕의 이야기가 실리는 본기(本紀)에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한나라의 시대가 아닌가. 한나라의 천하통일이 하늘의 뜻이라는 정당성을 설파해도 모자랄 판에 가장 거슬렸던 적에게 당당히 역사서의 한 장을 선물하다니…
사마 천은 진시황제의 일생의 공과 과를 객관적으로 상세히 밝혔다. 군현제 실시를 비롯, 도량형, 화폐, 수레바퀴, 문자를 통일하는 등 중국 역사 최초로 중앙집권 체제를 마련했다는 그의 공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또 한 편으로는 위대한 업적 이면에 짙게 드리워진 탐욕과 교만을 서술했다. 아방궁 건설과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폭정과 스스로를 진인(신선)이라 칭하며 신선과 불로초를 찾아다녔던 그의 기행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진나라가 변법을 내세워 성과를 얻었음에도 후인들이 과소평가하는 것이 슬프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천하를 놓고 한나라 유방과 싸웠던, 결국은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전장에서 최후를 맞이한 항우에게는 그의 젊은 혈기와 어리석은 판단력을 아쉬워하는, 어쩐지 인생 선배로서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전투를 앞둔 항우의 심리적 갈등과 그 죽음을 그린 장면은 사기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항우는 밤에 일어나 막사 안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에게는 이름이 우라고 하는 미인이 있었는데 총애하여 늘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추라는 이름의 준마가 있었는데 늘 타고 다녔다. 이에 항우는 비분강개하여 직접 시를 지어 노래롤 읊었다.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불리하여 추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중략. 마지막 전투 장면)
그러고 나서 정장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장자임을 알겠다. 내가 이 말을 탄 지 다섯 해째인데, 맞설 만한 적이 없으며 하루에도 천 리를 달려 차마 이 말을 줄일 수 없으니 그대에게 주노라"
그러고는 기병들에게 모두 말에서 내려 걷게 하고 자신은 짧은 무기만을 들고 싸움을 벌였다. 항우 혼자서 죽인 한나라 군대가 수백 명이었다. 항우의 몸 또한 십여 군데 부상을 입었다. (항우본기 중)
승자라고 마냥 떠받들지 않는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고조)의 부정적인 모습도 언급하고 있다. -- 초나라 기병이 유방을 쫓아오니 유방은 다급한 끝에 혜제와 노원공주를 수레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으나 하후영이 항상 내려가 그들을 수레에 태웠다. 이렇게 한 것이 세 번이나 되었다. [하후영이] 말했다. 비록 위급한 상황이고 말을 빨리 몰 수 없긴 하지만, 어찌 자제분들을 버리십니까" (항우본기 중)
그가 역사의 패자들에게 자신만만한 승자의 칼날 만을 들이댈 수 없었던 이유는,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역사가로서의 사명감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사마 천 본인이 당대의 패자였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나이 49세였던 서기 97년, 남성을 거세하는 궁형을 당한다.
이릉이라는 장수가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항복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당시 황제의 처남이었던 이광기는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대적하다 쫓겨 퇴각했고, 겨우 5천의 보병으로 흉노를 대적하던 이릉에게 원병을 보내지 못해, 궁지에 몰린 이릉이 항복한 사건이었다. 조정은 그가 의도적으로 항복을 하였네, 흉노에서 군사 훈련관으로 일하고 있다네 거짓소문까지 돌았다.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 이릉에 대한 변호는 자칫 잘못하면 원병을 보내지 못하고 3만의 병사로도 퇴각했던 황제의 처남, 이광기에 대한 비난으로 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마 천은 이릉과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던 사마 천은 이릉은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변호했고 이것이 황제의 분노를 사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은 거액의 돈을 납부하던가 아니면 궁형을 택하는 것이었다. 궁형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시에 훨씬 치욕스런 형벌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효(孝)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던 당시에 남성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것은 대를 이을 수 없는, 그래서 차마 조상을 볼 면목이 없을 정도로 치욕스런 형벌이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궁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은 치욕스런 형벌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자살을 선택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죽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권면과 조롱 가운데서는 그는 삶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유언,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 참조: 팟캐스트 인문학 라디오, 김선자 교수의 길 위의 여행자 사마 천의 사기, 2013년 7월 3일 업로드, http://www.podbbang.com/ch/5644)
당시 상황이 그로부터 몇 년 뒤, 친구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에 설명되어 있다.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
사람들은 죽음만도 못한 삶을 꼭 살아야겠느냐고 수군거렸을 거다. 그는 일종의 패배자이자 실패자였다.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정치적으로도, (효의 근원을 어겼으니) 사상적으로도, (대중의 생각, 기준과 달랐으니) 사회적으로도 실패한 사람이었다. 역사가인 사마 천은 패배를 하고 나서야 패배자의 삶을, 그리고 패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삶을, 다른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을지 모른다.
문왕(文王: 서백 창)은 구금된 뒤에 주역(周易)을 연역했고 공자(孔子)는 곤경에 빠지셨을 때 《춘추(春秋)》를 지었습니다. 굴원(屈原)은 추방되어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은 눈이 먼 후에 《국어》를 편찬했으며 손빈은 다리가 잘린 뒤에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가 촉으로 쫓겨난 뒤에 《여람(여씨춘추)》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 이들은 모두 가슴에 맺힌 바가 있었으나 그 뜻을 통하게 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줄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마 천은 지난 날을 서술하여 미래에 희망을 걸기 위해 역사서를 쓴다고 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모두 1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자 수는 52만6500자에 이른다. 서기 91년 전후로 완성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연도에 따라 쓰지 않고 인물별, 소재별로 글을 쓰는 기전체를 택했다. (사마천의 뒤이어 나온 반고의 "한서"로 대표되는) 역사적인 사실만을 서술하는 전통적인 역사 서술 방식을 탈피했다. 이 책의 역자, 김원중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느낀 바를 날카롭게 지적했고, 개인적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객관적 실체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전통적 역사 서술 방식을 외면했다.
보통 열전(列傳)이 훨씬 재밌다고 한다. 본기(本紀)는 지루한 부분도 많다. 그러나 본기(本紀)를 읽으며 한 역사가의 인생과 사명, 그리고 그것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그의 객관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성학집요(관련 글은 여길 클릭)에 이어, 고전독서모임에서 읽은 두 번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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