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에서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의 야간열차다. 기차를 탔는데 밤 8시.
가뜩이나 웬지 여유로운 마음이 드는데, 다행히도 내가 탄 칸에 한국 남학생 2명이 탔다.
너무 다행인게, 난 런던에서 샤워하다 넘어져 다친 갈비뼈 때문에 이층침대를 탈 수가 없다. 그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 다행히 밑에 칸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니 엠티 가는 기분이다.
아침에 일어나 겨우 눈을 비비며 처음 만난 베니스.
활기찬 베니스의 골목골목을 나는 돌아다닌다.
리알토를 지나, 산마르꼬 광장으로 향하는 길... 이 구불구불하고 미로같은 골목을 그저 지도없이 헤매며 돌아다닌다. 지도가 필요없는 도시... 지도가 있어도 길을 잃을 것이므로 지도 없이 다니는게 난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오직 더 표지판만을 의지해 산 마르꼬 광장으로 향한다.
베니스는 가면과 물의 도시다.
산 마르꼬 광장. 비둘기가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아서 난 조심조심 다닌다. 산 마르꼬 광장의 그늘에 앉아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한다.
소박하지만 괜찮았던, 기차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유스호스텔.
오후 2시.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고, 부라노섬으로 가기로 했다. 베니스를 다녀온 후배가 그랬다. 사람들은 리도섬이나 무라노섬을 많이 가지만, 꼭 부라노섬을 가라고.
후배는 신신당부를 했다. "선배, 무!가 아니라 부!야. 꼭 기억해야 해. 특히, 부라노섬에서 베니스로 돌아오는 길에 보는 석양은 정말 죽여 줘~~~ 그 석양을 꼭 봐야해!" 리도에서는 해수욕을 할 수 있고, 무라노섬은 유리공예로 유명하다지만, 부라노섬은 특별히 뭔가 유명한 것은 없다. 그냥 조용한 어촌 마을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라노섬과 리도는 배를 타고 20-30분 거리지만, 부라노는 거의 1시간을 나가야 한다. 그래서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은 부라노를 부담스러워 한다. 하지만, 1시간을 나가야 하기에 부라노섬은 더욱 매력적이다. 그냥 평범하고 아주 조용한 어촌마을, 부라노섬.
그리고 따뜻한 해변마을답게 선명한 색들을 가지고 있다.
조용한 마을을 돌아다니다, 소박한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 요기를 했다. 신선한 야채가 살아있고 치즈가 들어있는 저 음식은, 이탈리아 여행 통털어서 밖에서 사 먹은 음식 중에 가장 최고였다. 신선하기 그지 없었다. 피렌체나 로마에서 먹었던 비싸기만하고 실망스러웠던 핏자 조각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부라노 섬을 가는 배 중에서 중간에 무라노를 들르는 배도 있다. 우연찮게 그 배를 탄 김에 중간에 잠시 내려 무라노를 들렀는데, 난 그 섬은 그저 그랬다. 특색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부라노 섬이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 섬에서는 흙을 밟을 수 있었던 점이다. 베니스는 흙이 없다. 무라노도 그렇다. 그런데 부라노에는 흙이 있다. 겨우 하루 밟지 않았을 뿐인데, 흙을 밟고 나자, 발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이었다.
후배가 신신당부했던 것처럼, 나는 석양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베니스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전날 야간열차에서 피곤했던 나는 8시가 지나야 내리는 석양을 2시간이나 더 기다리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그 "죽여주는" 석양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나는 베니스를 또 다시 올 것이다. 내가 뭘 몰라서 겨우 베니스에서 1박만 하기로 했던 것을 아쉬워하며....
베니스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며...
베니스는 참 희안한 도시다. 그렇게 관광객들이 드글거리는 프라하를 싫어했음에도, 나는 관광객 천지인 베니스는 너무 좋았다.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행 중에 어떤 도시에 실망하게 되면 - 예를 들면, 피렌체 - 이렇게 위로하곤 했다. 너무 짧게 머물러서 그런 거라고. 그 도시의 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그러나 단지 1박을 했을 뿐인 베니스가, 나는 너무 좋았다. 다시 올 것이라고 다짐하고, 왜 1박만 계획했을까를 아쉬워할 정도였다. 베니스는 하루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그놈의 배낭여행 책자를 비난할 정도로 사랑한다. 맞다. 그놈의 배낭여행 책자가 말하는 것처럼 베니스에서 뭔가를 보는 것은 하루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여유롭고 활기찬 공기가 있다. 나도 모르게 관광객다운 발랄함을 즐기게 하는 공기가 있다. 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은 사람을 여유롭게 만든다. 이 발랄한 분위기 때문인지, 나는 평소에는 안하던 짓을 했다. 산 마르꼬 광장에서 파는, 빨강머리 앤이 썼을 법한 납작한 모자를, 모자 테두리에 VENEZIA라고 적혀 있는 리본이 펄럭이는, 그래서 베니스를 떠나면 쓰기 민망한 모자를 6유로를 주고 샀다. 관광객다운 분위기를 마구 즐기고 싶었다. "맞아요, 저 관광객이예요~ 저 기분 완전 좋아요" 라고 소리치는 저 모자!
나는 이 모자를 베로나에서도 자알 쓰고 다녔다. 물론 VENEZIA라고 쓰인 리본을 그대로 달고 있는 건 베로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파란 리본을 반을 접어 글씨를 가리고 다니긴 했다. 그 모자는 베로나까지는 어울렸지만, 피렌체에서는 죽어도 쓸 수가 없었다. 도시마다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예를 들면 피렌체에서는 이런 모자를 써야 한다. (피렌체 시장에서 찍은 모자 사진)
모자는 아씨씨에서 만난 한국 학생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의 다음 여행지가 베니스라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선 이런 모자가 필요하다고 잘 애용해 달라고, 나의 사랑스런 빨강머리 앤 모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베니스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몸을 쓰는 젊은 이탈리안의 활기참이 있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길의 베니스에는 차가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아침마다 부둣가에는 짐을 가득 실은 배들이 온갖 호텔, 레스토랑, 상점이 필요한 물품들을 내리고 싣는다. 그리고 손수레로 좁은 골목길을 달린다.
전날 나는 세상에나... 7시에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7시에 일어났다. 사실은 한 2시간만 자고 일어나 저녁도 먹고 야경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만 꼬박 자 버린거다. 그래서 베니스의 야경을 놓쳤지만 아쉽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여길 또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충분한 수면으로 회복된 최상의 컨디션으로,
리알토로 가는 어느 골목길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땡땡땡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맛있는 커피와 달디단 빵을 먹으며,
활기찬 베니스의 아침을,
정말 100% 즐기는 것이었다.
베니스를 다시 온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하릴없이 그저 도시를 배회할 것이다. 나중에 올 때는, 이번에 놓친 부라노섬에서 베니스로 돌아가는 배에서의 석양을 볼 것이며, 산 마르꼬 광장에서의 야경을 즐기고, 이번엔 못한 곤돌라 위에서 베니스의 뒷골목을 바라볼 것이다. 어느 도시에서 하고 싶은 무언가를 남겨두고 오는 건 좋은 일이다.
베로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친구에게 엽서를 쓰며...
나는 베로나에 아레나홀의 야외 오페라 AIDA를 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