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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4백년 전, 한 남자가 택한 보길도에서의 삶

낯선 곳에서 놀기/우리나라 좋은나라

by sundayeunah 2013. 11. 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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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강진, 보길도, 진도를 돌아 본 3박 4일 이번 여행의 여정.

1일차: 서울 --> 강진 무위사 (관련 글은 여길 클릭)  --> 영랑생가 (관련 글은 여길 클릭) --> 다산초당과 다산문화관 (관련 글은 여길 클릭)--> (백련사) --> (녹우당) --> 대둔사 (관련 글은 여길 클릭) --> (두륜산 케이블카) --> 송지 해수욕장 --> 땅끝마을 숙소 (관련 글은 여길 클릭)

2일차: 땅끝마을 --> 보길도 윤선도 사적지(세연정,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 보길도 해안도로 --> 땅끝마을

 

 

 

오늘은 보길도다.

나에게 보길도는 일종의 로망 같은 곳이다. 학교 다닐 때 동기 하나가 보길도와 땅끝마을을 다녀왔다고 했는데 그게 어찌나 대단해 보이던지. 그때의 나에게 이곳은 멀어도 멀어도 너무 멀었다.  -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차도 없이 어찌 다녔는지 싶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다시 한번 느낀 건데 산행을 하는 게 아니라면 국내 여행은 차 없이는 참 하기 힘들다. 그 중에서 보길도는 정말, 대안이 없는 곳이었다.

 

아침 7시 30분.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린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선착장까지는 걸어서 3분 거리. 땅끝마을이라고 불리는 이 동네는 대단히 작은 동네다. 8시 배를 타고 노화도로 들어가 노화도와 연결된 다리로 보길도를 들어갈 예정이다.

 

 

 


 

 

 

나와는 처음으로 배를 타 보는 순돌이. 배에 어떻게 오를지 무척 긴장했는데 안내해 주시는 아저씨들의 가이드로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그냥 하라는대로만 하면 되니깐.

 


 


 


 

 

 

강진이 다산(茶山)이라면, 보길도는 고산(孤山)이다. 외로운 산, 윤선도.

1587년(선조 시대) 나서, 1671년(현종 시대) 죽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시대를 두루 거쳤다. 남인과 서인의 대립 한가운데서 서인의 세력에 밀려 함경북도, 경상남도 등지로 16년 간 유배생활을 했다.  

 

병자호란이 나자 그는 의병을 조직해 강화도에 갇힌 왕자들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배가 강화도에 도착하기 전에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분개한 그는 평생을 은거하며 살 생각으로 제주도로 향하나 가는 길에 만난 풍랑은 그를 보길도에 내려 놓았다. 

이 곳의 자연풍광에 푹 빠진 그는 이 보길도를 부용동(芙容洞, 즉 연꽃의 얼굴을 가진 동네)이라 이름짓고 이 곳에 파묻혀 지낸다. 해남 윤씨, 윤선도의 본거지 해남과도 가까워서 좋았을 것 같다. 

윤선도의 5대 외손(증손자의 증손자)이 다산 정약용이다. 약 200년 후, 이 윤선도의 5대 외손자는 해남 옆 동네인 강진으로 18년 유배생활을 하게 되고, 해남 윤씨 집안의 소유였던 산 속 집,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머물며 500 여권의 책을 쓴다.

 

 

세연정 (洗然停)     

윤선도가 만든 정원이다. 정말 감탄이 절도 나온다. 계곡의 물을 막아 못을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

 

 

 

 

 

 

 

 

 

 

10월 초인데도, 녹음이 여전히 짙다. 세연정 앞의 소나무는 윤선도가 부용팔경의 하나로 꼽았을 만큼 힘 있고 아름다웠다. 400년 전에도 여전히 존재했을 저 소나무.

 

 

 

 

 

 

세연정 정자

 

 

 

 

 

 

세연정 주변의 잘생긴 바위 일곱을 지칭하여 칠암(七岩)이라고 불렀단다. "잘 생긴 바위"라는 표현이 재밌다. 

그 중의 하나인 사투암(射投岩)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 발 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바위다. 연못 쪽으로 들려진 부분에 발을 딛고 활을 쏘았다고 한다.

 

 

 

 

또 다른 '잘생긴 바위'인 혹약암(惑躍岩)이다. 뛸 것처럼 미혹하는 바위란 뜻으로 "뛸 듯 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의미란다.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라고 안내문에는 설명되어 있었는데 듣고 보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는 그저 "잘생긴 바위"이다. 생기긴 참 잘~ 생겼다.

 

 

 

 

 

 

고산 윤선도는 낙서재(樂書)를 지어 거처로 삼고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曲水堂)이라고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지어 별장으로도 활용했다.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머물렀던 곳이고, 곡수당은 그 아들이 머물렀던 곳이락 한다. 세연정,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모두 다 근처에 있다.

 

낙서재(樂書

 

 

 

 

 

 

낙서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바로 곡수(曲水堂)이 있다. 일종의 아들네 집.

 

 

 


평일의 보길도, 더군다나 여기는 너무나 조용하고 고요하다. 윤선도가 이 곳에 낙서재와 곡수당을 지을 당시에 나무가 빽빽한 숲이었다고 한다. 낙서재에서 곡수당으로 내려가는 한적한 길.

 

 

 

 

낙서재에서 저 멀리 바라보이는 동천석실. 나무가 없이 바위가 드러난 부분이 동천석실이 자리잡은 곳이다.

 

 

 

차로 5분도 못 미치는 도로에 차를 주차해 놓고 이제 동천석실로 올라가 보기로 한다. 약간은 가파른 산길을 한 20분 정도 걸으면 나온다.

방 한 칸의 작은 공간이다. 여기서 책도 읽고, 마을도 보고, 바람도 맞았을 것이다. 고산은 부용팔경 중 하나로, 석실의 저녁 연기를 꼽았다. 아마도 저녁 이 동천석실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저녁밥 짓는 연기가 아니었을까. 따뜻한 밥냄새와 함께 올라오는 따뜻한 온기. 

 

 

 

 

 

동천석실에서 바라다보이는 마을 전경.


 

 

 

 

 

그의 이력에는 "벼슬을 버리고 해남으로 내려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너무 많아 일일히 세기 힘들다. 사퇴 뿐 아니라 사양하고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은 것도 여러 번. 서인들의 탄핵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인조와 효종은 참으로 끈질기게 윤선도를 불렀고, 윤선도는 참으로 끈질기게 사양과 사퇴를 계속했다.

1631년의 경우만 봐도 6월 호조정랑 임명, 9월 사직 후 해남 행, 11월 형조정량 임명, 곧 사직, 1632년 1월 호조정랑 제수, 2월 왕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 3월 한성부 서윤 임명, 11월 병으로 사임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2년 사이 4번의 임명과 4번의 사직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고산 윤선도 여길 클릭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고 한다.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발언 등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할 말은 하고 본다는 그의 성격은 당쟁으로 얼룩진 그 시대 정치 상황에서는 자주 탄핵의 빌미를 제공했을 것이다.  

 

 

조선의 정치에서 생존의 조건인 침묵을 지키지 않는 불 같은 성깔은 결국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환하려는 잠재된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고의적 유배이자 문학으로서의 길을 여는 춤사위였을 것이다. (중략)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그는 조정에 남아 있는 세속적인 권력자들에게 그렇게 되뇌고 홀가분하게 떠났다. 임금이 불러 다시 돌아오곤 했지만, 그는 자주 떠났다. (송호근, 나타냐와 자작나무, p.27)

 

 

그는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 많은 시가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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