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뉴욕
유일하게 빠진 곳이 있다면 자유의 여신상이었을 거다. 굳이 멀리서 봐도 될 것을 돈을 내고 가까이 볼 이유가 없을 거 같아서 관뒀다. 관광 명소가 그렇듯이, 안 가면 서운하지만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은 다 다른 것들이었다. 그래도 한번은 찍어 주었기에 덕분에 다음 뉴욕 여행은 좀더 알찰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뉴욕에서의 첫 일주일.
무슨 일일까 싶어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봤더니, Fuck Bush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던 여학생들이 말하길, 지금 공화당 전당대회 비슷한 것을 뉴욕에서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행사가 뉴욕에서 열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공화당 당원들이 행사를 끝내고 호텔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켜 저렇게 야유를 퍼부어대는 것이라고.
게다가 방법도 가지가지다. 자기 집에다 저렇게 걸어놓겠다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브룩클린 다리에서 본 풍경.
잔디에 편하게 널부러져 음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의 친구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지는 거다. 아주 편한 친구들과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이 공연을 함께하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울어버렸다. 다행히 음악소리는 너무 크고, 여기는 너무 깜깜해서 나는 마음 놓고 어깨를 들썩거릴 수 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공중전화로 달려가 친구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 기집애, 수신자 부담이구나, 라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또 센치해 질려고 한다. 아주 서운하면서도 시원한 밤이었다. 9/1 22:00
Broadway Show
뉴욕에서 나는 오전 시간은 뮤지컬 티켓을 구하느라, 저녁 시간은 뮤지컬을 보느라 시간을 썼다. 보고 싶은 쇼를 하는 극장 앞에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면, 학생할인티켓이나 러쉬 티켓이라고 불리는 당일 티켓을 싼 값에 구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의 둘째 날. Chicago는 약간 기대에 못 미쳤다. 역시 난 클래식컬하고 스펙타클하고, 이런 것을 좋아하나 보다.
넷째 날 아침, Aida에 줄을 섰으나, 학생할인티켓이 매진됐다.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하긴 했다. 10시에 티켓 박스가 문을 여는데 겨우 30분 일찍 갔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The Phantom of the Opera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갔는데 운 좋게도 20불짜리 티켓을 얻다. 우리가 구한 티켓이 마지막 것이었다.
아, 정말 브로드웨이구나, 실감. Chicago를 보고 실망스러웠던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노래도 시원시원하게 머리 꼭대리로 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유령 캐릭터, 눈 깜짝하면 무대장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바뀌어 버리는 통에 2시간 30분을 숨 한번 못 쉬었다. 아, 이때 결심했다. 가능한 한 많이 쇼를 보고 가리라.
다섯째 날. 나는 결국 Lion King을 못 봤다. 그날 새벽 6시에 일어나 밥도 못 먹고 8시부터 줄을 서서 10시까지 기다렸건만, 나오는 대답은 자기네들은 러쉬 티켓이나 학생할인티켓이 없다는 말 뿐. 그 전날 다른 직원이 나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 거였다. 좌석이 다 매진될 경우에 한해서만 20불 짜리 스탠딩 티켓을 판다는 거였는데 그 직원은 그걸 나에게 러쉬 티켓이라고 잘못 이야기해 준 거였다. 창구 직원이 그런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보통 매진된다고. 난 그날 뮤지엄을 돌아다니다가 5시에 한번, 그리고 8시에 한번 극장을 들렀다. 창구 직원이 그런다. 오늘은 아무래도 어렵겠다면서 내일 다시 시도해 보라고. 생각해 보니, 그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여섯 째 날. 다시 Aida 도전. 8시부터 줄을 서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하다. 2시간이나 일찍 나갔는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맨 처음 줄을 선 사람은 새벽 1시30분에 왔다고 한다. 또 나 같은 관광객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이상해서 옆에 사람에게 이게 common한 거냐고 물어봤다. 그 친구 왈, 내일 아이다가 막을 내린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라고. 20불짜리 학생할인티켓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지만 그래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것저것을 끄적거리며 간만에 여유를 즐기다. 마침 그날은 토요일이라 2시 공연 티켓을 33불을 주고 샀다. 티켓을 사고 나서야 그날 아침을 안 먹었다는 생각에 갑자기 허기가 져, 소금이 짭짤하게 뿌려진 프레즐을 길거리에서 사 먹었다.
2004년 여름 뉴욕에서, 나는 꽤나 예민하고 날카로웠던 것 같다.
뉴욕을 떠나면서, 나는 너무너무 아쉬워서 뉴욕에서 해야 할 많은 일을 남겨뒀다.
다음에 오면 재개관하는 MOMA를 가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오페라를 보고, 라이온 킹을 보고, 센트럴 파크에서 마차를 타고, 차이나타운에서 쇼핑을 하고, 그린위치 빌리지를 밤에 돌아다니고, 그라운드 제로 앞에 있다는 폭탄할인매장에서 쇼핑을 할 거다. 참, 뉴욕 스테이크도 먹어야지...라고 썼다.
- 그리고 나는 그 해 겨울 뉴욕엘 다시 가서 재개관한 MOMA를 보았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도 보았다. 라이온 킹은 아직 못 봤으나, 대신 더 재밌는 다른 것들을 보느라 볼 수 없었던 것이고 센트럴 파크의 마차와 차이나타운의 쇼핑은 그 사이 흥미가 떨어져 버렸다. 시간이 흘렀고 나도 변했다.
Staten Island로 가는 페리에서 바라 본 뉴욕 맨하튼
Public Library. 이 방은 정기간행물실인데 너무 고즈넉해서 도서관 투어 중간에 빠져 나와 그냥 여기서 시간을 보냈다.
42번 가 역사.
뉴욕에 가는 버스를 올라탈 때부터 뉴욕을 떠나는 버스에 올라탈 때 까지, 나는 바빴고, 지쳤고, 예민했다. 날이 많이 서 있었기에 뉴욕이 더 좋았을 수도 있고, 이것 때문에 여행이 더 나빴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스톤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정말 휴식하러 가는 마음이 되어, 가이드 북을 꺼내놓고 가볼 만한 곳, 단지 3곳만 정하게 되는 것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본 야경. - 숙제하러 간 심정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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