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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잡고 웃다가도 순간 먹먹해지는,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

속에서 놀기/책 속에서 놀기

by sundayeunah 2013. 8. 2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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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은 읽을 때면 하하하 소리 내어 배를 잡고 웃다가, 책장을 덮을 때는 뭔가 모를 아련함 때문에 마지막 장 덮는 것을 미적거리게 만든다.

그의 소설은 ‘재기발랄하다’는 표현은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투박하고 구수하고 호쾌하기까지 하다. 나는 성석제의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주변에 자랑하곤 했다. 타고난 이야기꾼, 입담꾼 등의 표현이 참 어울리는 작가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2003)’ 등의 단편집을 너무 좋아하며 읽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남는 소설은 오히려 그의 장편이다. ‘왕을 찾아서(1996)’와 ‘인간의 힘(2003)’. ‘왕을 찾아서’는 무려 17년 전 소설이다. 책이 절판되었다가 2011년 개정판이 나왔다.


 

‘왕을 찾아서’는 마사오라 불린 한 지역의 영웅이 어떻게 한 시대의 신화가 되어 군림하였다가 몰락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 속 화자뿐 아니라 모든 지역민의 마음 속의 영웅이었던 마사오는 오로지 주먹과 의리로 지역의 신화가 되었고 결코 조직의 힘 뒤에 본인을 숨기지 않았던, 그야말로 전통 건달(乾達)이었다.

이 책에는 대낮처럼 밝은 사내, 비밀과 암투를 취급하지 않았던 사내, 태양처럼 밝은 사내와 그런 영웅을 간직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왕과 신화는 사라지고, “조직의 시대가 왔다. 칼의 시대가 왔다. 사업의 시대가 왔다. 관리의 시대가 왔(p.234)”기 때문이다.


마사오는 정식으로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혼자 힘으로 떠오른 해였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줄 망정 다른 사람의 힘을 긁어 모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사오는 왕초도 두목도 대장도 아니었다. 그냥 마사오였다. (p. 218)

 

 

나는 이 책의 표지가 참 좋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다시 보면 느낌이 무척 새롭다. 이 책의 표지는 마치 책을 설명하는 또 다른 에필로그 같이 여겨진다.

 

 

황폐한 광야에 놓여 있는 빈 의자 하나. 화려했을 것 같은 의자지만 이제 너무 낡고 남루해졌다. 그 앞에 행색이 초라한 사내 – 80년대 사람일 것 같은, 그 시대 사람들이 10월부터 그 다음 해 4월까지 매일같이 내내 입었을 것 같은 ‘잠바때기’를 입은 – 가 맨발로 섰다. 마치 그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우산을 받쳐들고 서 있는 그의 표정이 착잡하다. 비닐봉투 속에서는 북어대가리와 장미꽃이 보인다. 왕은 떠났고, 그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 여길 찾은 남루한 사내는 비 속에서 버려진 왕의 의자가 마냥 슬퍼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신화는 화려했지만, 그가 떠난 현실은 풀 한 포기 없는 거친 광야였다. 나는 표지를 보면서 우산을 받쳐 든 이 사내의 심정이 되어 먹먹해진다. ‘한 시대의 몰락’이란 참 슬픈 말이다. 

 

책을 덮으면 그렇지만, 책을 읽을 때는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이 책은 성석제의 책이다. 그럴 리가 있을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의 문장들…

희안이 유리를 깬 유리가게 주인이 마사오의 친구 동생 친구의 동생 후배 선배였다. 그게 무슨 관계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인데 지역에서는 그것도 관계다. 경찰서장의 사돈 재종형이나, 시장 동창의 동생, 군 부대장의 운전병 고모가 큰 벼슬이듯이. 그렇게 안 걸리는 데 없이 그물코처럼 걸고 걸린 사이로 누천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지역 사람들이다.

(요 장면은 압권이다. 화자의 친구인 희안과 재천이 피 터지게 싸운 후 병원에 간 장면이다)
희안은 A형이었다. 피를 뽑을 수 있는 사람은 O형인 나와 O형일 게 틀림없는 당직 의사, 누가 봐도 A형이라 할 간호원, A 아니면 O형이 틀림없는 또 다른 응급 환자들이었다. 그러나 의사나 간호원, 다른 응급 환자들이 언제 봤다고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도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희안에게 피를 뽑아주겠는가. 나는 피 같은 내 피를 뽑아 희안에게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이번에는 목에서 피를 흘리며 재천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B형이었다. 의사는 이번에도 피가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곤란해하자 의사는 조금 망설이는 척하다가, 일단 지혈 처리를 해줄 테니 나가서 선짓국이나 사 먹이라고 했다. 재천은 선짓국과 헌혈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를 보면서 누구는 뽑아주고 누구는 못 뽑아주느냐는 식으로 입을 있는 대로 내밀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또 1인분의 피를 뽑아냈다. 그러다 보니 피가 모자라는 두 사람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빈혈 상태에 빠졌다. (p.193)


읽을 때는 배꼽 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다가, 다 읽은 후에 슬픔을 주는 소설. 참 좋은 책이고, 멋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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